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
얀카 댜길레바
덤프버전 :
Яна Станиславовна "Янка" Дягилева
(1966.09.04 - 1991.05.09?)
1. 개요[편집]
야나 스타니슬라보브나 "얀카" 댜길레바(Яна Станиславовна "Янка" Дягилева)는 소련의 가수이자 시인이다[1] . 1980년대 후반 시베리아 지역의 여러 크바르티르니크[2] 및 타 음악가들과 협업을 통해[3]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이름을 알렸으나, 생전 공식 인터뷰나 대중매체 출연을 극도로 꺼렸기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.Я повторяю десять раз и снова, никто не знает как же мне хуёво.
나는 열 번이고 다시금 반복해, 아무도 내가 얼마나 좆같은 기분인지 모른다고.
И телевизор с потолка свисает, и как хуёво мне никто не знает
텔레비전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, 얼마나 내가 좆같은 기분인지 아무도 몰라.
Всё это до того подзаебало что хочется опять начать сначала
이 모든 것에 질릴 대로 질러버려서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
Мой стих печальный, он такой, что снова я повторяю - как же мне хуёво.
나의 시는 구슬퍼, 그러니 나는 또다시 반복해, 내 기분은 좆같다고.
-얀카 댜길레바, "나의 슬픔은 밝게 빛난다"(Печаль моя светла)
1991년 사망하였으며, 현재까지 사망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다.그녀의 사망은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신의 종막을 상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.
2. 생애[편집]
1966년 09월 04일 소련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기사(инженер) 부부였던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댜길레프 및 갈리나 데멘티예브나 댜길레바 사이에서 태어났다. 학창 시절 잠시 피아노 교육을 받기도 하였으나, 도중에 포기하였다. 이후 동호회에서 기타 연주를 배웠으며 학교 내 아마추어 공연도 몇 번 참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.
학창 시절 과학 등 이공계 과목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, 인문학, 특히 문학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었다. 학창 시절부터 댜길레바는 수많은 작가들의 책을 읽었으며 많은 에세이 및 시를 썼다[4] .
1984년 노보시비르스크 수력 공학 전문학교(НИИВТ)[5] 에 입학하였으나, 2학년 때 중퇴하였다. 당시 그녀는 정치적 노래 동아리였던 "아미고(АМИГО)"의 일원이었다.
1985-86년경 댜길레바는 노보시비르스크의 크바르티르니크에 참가한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와 첫 만남을 가진다. 바실라초프는 시인이자 바르드 음악가였으나 그의 가사와 음악은 러시아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. 댜길레바 또한 자신보다 한 살 더 많았던 바실라초프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, 둘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된다.
1987년 4월 댜길레바는 시베리아의 펑크락 밴드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예고르 레토프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되며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베이시스트로도 활동하게 된다. 레토프는 당시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대표 인사 중 하나였으며, 바실라초프와 함께 댜길레바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. 당시 레토프는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으로 인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중이었는데[6] , 댜길레바 또한 레토프와 함께 1년에 가까운 기나긴 도주길에 오른다[7] .
1988년 1월 댜길레바는 비공개 공연을 가졌고, 이 녹음본은 훗날 "허가받지 않음(Не положено)"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발매된다. 이후 7월 그녀는 튜멘에서 첫 대규모 공연을 가지게 된다[8] .
1988년부터 1990년까지 댜길레바는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혹은 기타 밴드의 멤버로, 혹은 솔로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열었다.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으로는 그라즈단스카야 오보로나 멤버로 제5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[9] 참가했던 것이 있다. 당시 이들의 디렉터는 세르게이 피르소프[10] 였으며, 피르소프의 디렉팅 하에 이들은 탈린, 레닌그라드, 크림 등을 돌며 공연을 펼쳤다.
1990년 11월 댜길레바의 마지막 공개 공연이 있었고[11] 1991년 2월 말 노보시비르스크 전기공학 전문학교(НЭТИ) 기숙사에서 마지막 앨범 녹음이 있었다.
3. 사망 그리고 미스터리[편집]
Пускай у тебя всё будет хорошо. Я тебя очень люблю. Дай Бог избежать тебе всех неприятностей.
(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래. 정말 사랑해. 신께서 모든 문젯거리들을 해결해 주시기를)
-얀카가 친구 몇몇에게 보낸 편지. 1991년 5월 10일 도착했다고 한다.
1991년 5월 9일 댜길레바는 가족의 장례식[12] 이후 가족과 함께 이냐(Иня) 강 근처에 있던 다차[13] 에 가게 된다. 그날 저녁 댜길레바는 담배 한 대 피우며 산책하고 오겠다며 다차를 나섰고, 그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.
이후 가족들은 그녀를 찾아나섰으나 실패하였고, 경찰은 수색에 나섰다. 실종 8일 뒤인 5월 17일, 한 낚시꾼이 이냐 강에 떠올라 있던 그녀의 시체를 발견하며 수색이 종료되었다. 향년 24세였다. 이후 얀카의 시신은 자옐초프스코예(Заельцовское) 공동묘지에 묻혔으며,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[14] .
그 뒤로 이어진 조사에도 불구하고 댜길레바의 사망은 여전히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신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. 당장 그녀가 사망한 날짜와 장소조차 확실하지 않으며[15] , 명확한 사망 원인 또한 불명이다. 공식 사인은 실족사이나, 사망 원인에 대해 자살설, 사고설, 타살설 등이 대립하고 있다.
-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댜길레바가 1991년 전후로 심각한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든다. 1986년 얀카의 모친이 암으로 사망했고, 1988년 얀카의 멘토였던 바실라초프가 자살했다.[16] 또한 한때 연인이기까지 했던 댜길레바와 레토프는 당시 사이가 매우 소원한 상태였다.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댜길레바의 멘탈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으며, 후기 곡들인 "무쾌락증"(Ангедония)[17] 이나 "물이 오리라"(Придет вода)[18] 는 명확히 우울과 죽음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.[19]
- 타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얀카 지인들의 증언을 근거로 삼는다. 많은 증언에 따르면 당시 얀카의 기분은 확실히 우울해 보이긴 했으나 동시에 잘 웃고 장난을 치는 모습 또한 보였으며, 자살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고 말한다. 또한 얀카의 친구들은 얀카는 차가운 물을 매우 싫어했기에, 설렁 자살을 하더라도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. 특히 레토프와 쿠지민[20] 은 적극적으로 얀카의 타살설을 주장하였으며, 범인은 술취한 동네 불량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 바 있다.[21] 공식 부검 보고서에서는 눈에 띄는 외상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나와 있으나, 많은 지인들은 얀카의 시체에는 후두부에 깨진 상처가 있었으며 폐에서 물이 발견되지 않았다(즉 강에 빠지기 전 사망하였다)고 증언한다.[22]
- 이 외 사고설 또한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지목된다. 실제로 그녀의 공식 사인은 실족사이다.
4. 음악 세계[편집]
댜길레바의 음악 세계는 절망과 우울, 죽음 등 어두운 이미지로 형상화된다.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+ 소련 민속 주제 + 소비에트 일상 생활에서 유래한 서글픈 이미지 + 부패하고 경직된 소련 체제에 대한 환멸과 실망, 풍자를 섞은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고유의 싯구 + 서구권 락의 멜로디가 합쳐진 특유의 음악 세계는 당시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으며, 고유의 펑크 스타일로 해석된 허무주의와 포크 스타일로 해석된 비애는 현재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.
5. 디스코그래피[편집]
생전 얀카의 작업물은 공식 앨범으로 발매된 적이 없으며, 그녀의 녹음본은 전부 예고르 레토프의 손을 거쳐 스튜디오 앨범으로 발매되었다. 레토프가 없었다면 얀카의 작업물은 소실되거나 질 낮은 부틀랙으로만 존재했겠지만, 이 과정에서 레토프의 의도가 너무 깊게 들어갔다는 평가 또한 받는다.[23]
- 허가받지 않음 (Не положено, 1987/2021)
- 체제의 낙오자들에게 (Деклассированным элементам, 1988)
- 팔렸구나! (Продано!, 1989)
- 무쾌락증 (Ангедония, 1989)
- 집으로! (Домой!, 1989)
- 수치와 모욕 (Стыд и срам, 1991)
- 십자가의 영 (Крестовый ноль, 1988-89/2022)
이 외 부틀렉 및 기타 정보는 여기서 확인 가능.
6. 여담[편집]
- 그녀의 공식 팬사이트가 있다. #
- 예고르 레토프의 곡 "오펠리아(Офелия)"는 댜길레바의 죽음에 바치는 곡이다.[24][25] 예고르와 좆병신들(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)의 이름으로 발매되었으며, 이후 공연 레퍼토리에서도 종종 등장한 바 있다. 레토프와 댜길레바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으며, 현재도 완전히 알려지거나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이 많다.
- 여기나 여기서 몇몇 곡들의 한국어 번역본을 찾아볼 수 있다. 영어 실력이 된다면 여기서 영어 번역본도 찾아볼 수 있다. 여기선 댜길레바의 시 번역본도 찾아볼 수 있다[26] .
- 생전 공식 앨범 취입이나[27] 인터뷰, TV를 위시한 각종 매체 출연에 부정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생전 메인스트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. 수많은 인터뷰 및 매체 출연에 앞장선 레토프와는 대조되는 부분. 오죽하면 그녀의 사망에 대해 신문에서 보도할 때 생전 사진을 찾을 수 없었을 정도[28]
— Просто поговорить — пожалуйста. Но в газете не должно быть ни строчки.
— Но почему? Может быть, это не нужно вам, но нужно другим?
— Те, кому это нужно, и так разберутся, кто я и зачем.
-
- 그냥 대화하는 건 괜찮아요. 하지만 신문에는 한 줄도 실려선 안 돼요.
- 어째서입니까? 본인은 불필요하다 느낄지 몰라도,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?
- 그게 필요한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, 어째서인지 알 거니까요.
(1990년, 어느 기자와 나눈 대화)